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한 후 경덕왕 1년 전국토를 9주5경으로 재편
할 때 한주(漢州)에 속한 김포반돌을 김포현 (김포, 고촌, 검단 지
역), 분진현(통진, 월곶 지역), 동성현(하성지역),수성현(양촌,대곶
지역),공암현(서울 강서구지역)으로 나누고, 앞의 네 현은 장제군
(長堤郡 : 현 부천)의 영현( 領縣 ), 공암현은 율진군( 栗津郡 : 현
시흥)의 영현이 되었다.
고려 성종 때에는 관내도(關內道 : 현 경기, 황해지역)에, 현종 9년(1018)에 수주( 樹州 : 부평부)의 속현이 되었다가 명종 2년(1182)
에 김포가 분리되어 비로소 감무( 監務)를 두었고, 신종 원년(1198)에 이 고장에 어태( 御胎)를 묻은 뒤 현령( 懸鈴 )을 두었다.
조선조 태종 14년(1414) 8월 양천현을 합병하여 금양현( 金陽懸 )으로 했다가 동년 10월 다시 분리하여 양천은 금천( 衿川 : 현 시흥 ), 김포는 부평부에 편입시켜 김포라는 이름조차 사라졌다가 동왕 16년 7월 원상회복시켜 김포현을 설치 하였다.
인조 10년(1632) 북성산( 北城山 )에 장릉(章陵)을 모신 후 김포현을 군으로 승격시켰고, 고종 32년(1895) 개편시 인천부에 속하는 군이 되었고, 고종 33년(1896)에는 4등 군수가 통치하는 군이 되었다.
옛날 통진, 월곶 일대에 자리잡았던 평회압( 平淮押, 또는 比史城, 別史波兒, 比北史城) 현은 경덕왕 16년 개정시에는 분진현으로 고쳐 장제군의 속현이 되었다가 고려때 통진현으로 고친 다음 공양왕 3년(1391)에 동성, 수안 두현을 합병하고 비로소 감무를 두었고, 조선조에 들어와 태종 13년(1413) 현감을 두었다.
숙종 20년(1694)에 통진부로 승격되었다가 고종 32년 개편 때 다시 통진군으로 되었고 동왕 33년에는 3등 군수가 다스리는 군이 되었다. 옛 동자홀현(또는 憧山)과 수이홀현은 경덕왕 16년 각각 동성현(장제군 영현), 수성현(장제군 영현)으로 개명된 뒤 고려초 수성현은 수안현이 되었다가 공양왕 3년 통진현에 병합되어 역사의 전면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양천땅의 옛고을 제차파의현은 경덕왕 16년 공암현으로 고쳐 율진군의 영현이 되었고, 고려 현종 9년(1018)에 수주에 속했다가 충선왕 2년(1310) 다시 양천으로 회복되어 현령을 두었다. 조선조 태종 14년 8월 김포에 합쳐서 금양현이라 했다가 동년 10월 재차 분리하여 금천에 합하였다가 동왕 16년 현으로 복귀시켜 현령을 두었고 고종 32년 전국 23부를 폐지하고 13도로 개편할 때 비로소 군으로 승격하여 인천부에 속했다.
1914년 3월 전국적인 행정구역 개편 때 김포, 통진, 양천군이 '김포군'으로 통합되었다. 통합 전 김포군에 속했던 군내면, 석한면, 고현내면은 군내면으로 , 검단면, 마산면, 노장면은 검단면으로, 임촌면, 고란태면은 고촌면으로 , 통진군에 속했던 부내면, 보구곶면, 월여곶면, 소이곶면, 고리곶면, 반이촌면, 질전면, 봉성면, 대파면, 양릉면, 상곶면은 지역조정을 거쳐 월곶, 하성, 양촌, 대곶면으로, 양천군의 현내면, 삼정면, 가배곡면, 남산면, 장군소면이 양동, 양서면으로 되어 9개 면으로 조정되었다.